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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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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전략 == [[독소 폴란드 분할|1939년 10월, 폴란드를 분할 점령해 소련과 국경을 접하게 된 독일은]], 미리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덕분에 양면 전쟁을 예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당시 총병력 450만 중에서 유의미한 병력이 170만 정도밖에 안 되는 상태였다. 그에 비해 프랑스는 해외 주둔군을 포함해 정규군은 200만, 그리고 단기간에 3~400만 이상을 추가 동원할 수 있다고 여겨졌는데, 독일은 이를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폴란드 침공에 국방군 거의 모든 부대들을 영끌해서 투입한 만큼 서부전선 라인강 방어선에서 독일군은 전혀 전쟁할 의사가 없음을 표명하는 동시에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을 많아 보이게 하려는 기만전을 펼쳤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프랑스군이 잠시 독일 국경을 넘어 진입했다가 독일군의 저항과 폴란드군의 결정적 패배 등으로 공세 의지를 상실하고 마지노선으로 되돌아가 틀어박혀 버렸다. > "서부 전선에서 완벽한 기만을 달성했기에 폴란드 전역에서의 승리가 가능했다. 만일 프랑스가 국방군 주력이 폴란드에 집중된 상황을 이용했다면 적이 라인 강을 넘어서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우리는 적을 저지할 수 있는 대책이 전혀 없었고 독일의 사활이 걸린 루르지대까지도 상실할 뻔했다." >---- > 1948년 8월 9일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당시 국방군 육군 총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의 증언[* 출처: 전격적의 전설, P50][* 전술했듯이 독일 제1군은 자르 지방으로 쳐들어온 프랑스군을 상대로 압도적 열세인 전력임에도 선전하며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서부전선 전력을 과대평가하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히틀러는 "어차피 빠른 시간 내에 병력을 충분히 늘릴 수도 없는 지금이 아직 프랑스가 동원을 마치기 전에 서둘러서 먼저 치고 보는 게 낫다."라면서 1939년 10월 중, 늦어도 11월 말에 프랑스를 침공한다는 계획을 군부에 명령함으로써 [[독일 국방군]] 참모본부를 대 패닉에 빠트렸다. 게다가 앞선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독일이 원했던 대로 깨끗한 승리는 아니었다. 비록 한달만에 폴란드를 쓰러뜨렸지만 독일군의 기갑전력과 보병의 제병합동은 그리 우수하지 못해 폴란드 군의 강력한 저항에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에게는 앞선 폴란드 침공에서 입은 데미지를 회복하고 새롭게 도입한 기갑부대를 활용한 기동전에 대한 교리 확립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략도 나름 근거는 있었다. 프랑스군의 동원체계는 상당히 굼뜬 편으로 예비군이 소집부터 전편되는 데 수 개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1939년 11월 시점에서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투입가능한 정규군 및 소집완료 예비군의 합계 자체는 대략 200만 대 200만으로 거의 대등했다. 특히 1차 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국경전투 패배 이후 빠르게 병력을 모집하고 파리 방면으로 보내면서 마른강에서 독일제국군을 저지했던 전훈에 따라 히틀러는 프랑스가 군을 소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빠르게 격파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에게는 군 복무를 마친 예비군 400만 명과 해외주둔군 150만 명이 더 있었다. 그래서 군부는 히틀러를 설득하여 겨울 동안은 전면적인 침공을 보류했다. [[가짜 전쟁]]의 소강 상태는 독 · 프 양국의 전쟁 준비 미비와 프랑스의 선 방어 · 후 역습 전략에 영향을 받은 사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독일은 군수 산업 가동율을 높여서 전쟁 준비를 가속했다. 당장 [[폴란드 침공|폴란드 전역]]이 종결된 시점에서 [[독일 국방군]]이 보유한 탄약은 전군에 필요한 기본 예비 탄약의 30~50% 미만이었다. 당시 기본 예비탄약은 전투 2~3회를 치르는 탄약이었으므로, 사실상 전군이 딱 한 번 싸우면 끝나는 탄약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폴란드 침공 당시 소모한 각종 기갑, 기계화 장비를 보충할 수 있는 귀중한 기간이 되었다. 또한 독일군은 폴란드군의 강력한 저항에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고 전술 기동 역시 매우 어설펐다. 독일군 장교단은 1차 세계 대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프랑스와 영국군의 전투력과 전시 태세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고, 폴란드 침공 시기에 활용한 전략과 전술이 연합군을 상대로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상당히 비관적으로 전쟁을 바라보고 있었다. > "폴란드에서의 전투 방법은 서방을 상대할 때 적용할 만한 것이 못된다. 완벽하게 편성된 상대에게는 효과를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 > [[프란츠 할더]] 1939년 9월 29일 > "이제 기습 작전의 가능성은 제로이다. 소중한 병사들의 목숨만 끊임없이 희생될 뿐, 프랑스를 쓰러뜨리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폴란드에서처럼 손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전쟁이 장기화되어 최악의 희생만 치르게 될 것이 분명하다" >---- > C 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상급대장 > " 폴란드 전역에서 확인한 전차의 가치를 총체적으로 평가할 때 반드시 규명해야 할 점이 있다. 강력한 방어체계를 구축한 서방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이러한 전술이 성공할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아니 전혀 없다" >---- > A 집단군 참모장 게오르그 조덴슈테른 중장 한편 참모본부는 1939년 10월 9일에 히틀러가 총통 지령으로 하달한 프랑스 침공을 현실화할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전 전까지만 해도 '지금 프랑스로 쳐들어가면 우리 독일은 망한다.' 같은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던 참모본부는 가능하면 협상을 통한 전면전 없는 종전을 원했고, 이 때문에 1940년 1월까지 제출된 작전들은 허술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어린애가 봐도 실패할 게 뻔해 보이는 작전을 내놓는다면 히틀러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섞인 일종의 태업이라는 견해도 있을 정도. 그런데도 히틀러는 정 안 되면 이대로라도 치고 나가겠다는 의견을 밝혔고 이 때문에 참모본부, 특히 참모총장이었던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은 '''"히틀러를 내가 직접 쏴 죽여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까지 위기감을 느꼈었다.[* 안 그래도 할더는 1938년부터 히틀러에 대해 저항했으며, 1939년 11월에는 실제로 [[쿠데타]]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할더 본인의 소심함과 더불어 순간적인 판단착오로 쿠데타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때의 쿠데타 멤버 중에 훗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프랑스에서의 사태를 주도한 슈튈프나겔 장군이 있었고, 할더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이 1939년의 반란 기도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러한 반발은 참모부뿐만 아니라 현장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발생했다. C 집단군 사령관인 레프 상급 대장은 '무모한 전쟁'이라며 반발했고 독소 전쟁에서 학살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악명 높은 발터 폰 라이헤나우의 경우, 1939년 11월 6일에 반히틀러파 정치인 칼 괴르델러를 만나 네덜란드에 독일군의 공세를 대비하라는 서한을 전달하는 반역 행위를 벌이기 이르렀다. 심지어 카이텔 역시 히틀러의 전쟁 명령에 완강히 반대하다 사직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으며 괴링은 히틀러가 정한 공격 시기에 반대하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반 히틀러 진영에서도 결국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고 우선 이기고 봐야된다는 쪽으로 여론이 몰렸다. 그러나 아직도 참모본부는 침공 작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당장 프랑스 침공에 투입할 부대[* 이때 독일은 있는 군대를 모조리 올인해서 2~3개 [[집단군]]을 만들었다.]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까에 대해서는 계속 우왕좌왕 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할더가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을 동안, 1939년 10월에 작성된 프랑스 침공작전 초기안에서 조공 부대로 결정된 A집단군(Heersgruppe A)의 참모장이, 누구든지 보기만 해도 "이놈 미쳤군!" 이라고 외칠 만한 기상천외하고 무모해보이는 위험한 작전 계획을 제출했다. 그 참모장의 이름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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